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성 왕씨 (문단 편집) ==== 복권 ==== [[태종(조선)|태종]] 13년부터 왕씨들이 드러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덮으며 넘어가고, 40여년이 지나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 왕조의 왕족들로 하여금 고려 왕실의 [[이왕삼각|제사를 지내도록 하고]] 그에 따른 물품 등을 지급하는 식으로 예우해 주기 시작하면서 60여년 동안 계속된 왕씨 탄압이 잦아들고 차츰 복성했다. [[세조(조선)|세조]]는 [[생일]] 잔치에 왕순례를 초대해 2품에 준하게끔 우대했다. 단종~세조 시기부터 개성 왕씨는 사족의 일원으로 조선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었다. 사족들은 중앙에서 벼슬한 쪽과 지역 향촌사회에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한 쪽으로 갈리는데 개성 왕씨는 후자쪽이었다. 《[[신증동국여지승람]]》과 1789년 편찬된 《왕씨 족보》를 참고하면 전라도 지역, [[구례]]와 [[익산|여산]], 조선 왕실의 본향이기도 한 [[전주]]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구례 지역에선 왜란-호란 시기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확고한 지배 사족으로 자리잡았다. 다만 철학왕국인 조선 사회에서 내세울만한 이름난 학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. 1789년 그때까지 전해오던 가전기록을 바탕으로 《왕씨 세보》를 다시 편찬했고, 태조 신성대왕 왕건이 [[수도(행정구역)|수도]]로 정한 [[개성시|개성]]을 [[본관]]으로 했으며, 태조의 아들 중 종법상 서열이 15번째였던 왕원을 1세 조상으로 했다. 이것은 고려가 망한 지 거진 400여년 만의 일로 정조 대에도 개성 왕씨를 찾아내 본성을 쓰게 하기도 했다. 퇴계 이황과 교분이 있었던 왕희걸은 왕씨 문중에서 최초의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었고,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. 선조 때 왕의성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순조 4년에 지평(持平)·도승지로 증직되었다. [[흥선대원군]] 대에는 대원군이 왕씨 인물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, 동부승지를 지낸 왕정양 등이 대단한 벼슬을 한 [[정치인]]으로 이름을 올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